- 빈 점포를 시민에게 돌려주면 도시가 다시 움직인다
― 고베의 교훈에서 동해시의 NPO·시민공간 정책을 생각한다
도시는 건물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무언가를 함께 시작할 때 비로소 도시는 살아 움직인다.
요즘 동해시의 거리를 걸으며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빈 점포다.
천곡동에서도 보이고, 여기 저기 보인다. 한때 사람들이 드나들던 상점의 문이 닫히고, 간판이 내려지고,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다.
경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하고 끝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저 빈 공간에 다시 사람을 불러들일 방법은 없을까?”
그 질문을 생각하다 일본 고베의 경험을 떠올린다.
1995년, 일본 사회가 시민의 힘을 다시 보았다
1995년 1월 17일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했다.
엄청난 피해 앞에서 행정의 힘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그때 일본 전국에서 수많은 시민과 자원봉사자들이 피해지역으로 모여들었다.
구호물자를 나르고, 이재민을 돕고, 지역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1995년을 ‘볼런티어 원년’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재난 현장에서 확인된 시민사회의 힘은 일본 사회가 NPO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시민활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었고, 결국 1998년 일본은 「특정비영리활동촉진법」, 이른바 NPO법을 제정했다.
따라서 고베 대지진 이후 NPO가 처음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NPO와 시민활동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고베의 재난은 시민의 자발적인 힘이 국가와 지방정부가 미처 닿지 못하는 영역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일본 사회 전체에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행정이 하지 못하는 일을 시민이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NPO는 단순한 봉사단체가 아니다.
복지, 환경, 문화예술, 청소년, 관광, 교육, 도시재생, 고령자 돌봄 등 지역사회 곳곳에서 행정과 시장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시민 스스로 해결하는 조직이다.
그렇다면 지방정부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행정이 모든 사업을 직접 기획하고 직접 운영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시민에게 공간을 내주고,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일본에서도 지역에 따라 빈 점포와 유휴건물을 NPO·지역단체·청년들의 활동공간이나 공유주거, 커뮤니티 거점 등으로 활용하면서 상점가와 지역을 다시 활성화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확히 짚어야 한다.
일본의 모든 지자체가 빈 건물을 매입해 NPO에 무상으로 임대하는 단일한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 공공공간 제공, 빈 점포 활용, 임대료 지원, 민관협력 등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 흐르는 생각은 흥미롭다.
비어 있는 공간을 방치하기보다 사람과 활동을 집어넣어 도시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해시는?
나는 이 지점에서 동해시를 바라본다.
동해시 역시 원도심과 상권의 공동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빈 점포가 하나 생기는 것은 개인의 사업 실패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거리에 빈 점포가 여러 곳 생기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도시의 문제가 된다.
빈 점포가 늘어나면 유동인구가 감소하고, 유동인구가 줄면 남아 있는 상점의 매출이 감소한다.
또 다른 점포가 문을 닫는다.
이것이 도시 공동화의 악순환이다.
그렇다면 이 흐름을 거꾸로 돌려보면 어떨까.
‘동해형 NPO·시민활동 공간’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동해시가 장기간 방치된 빈 점포와 유휴건물을 조사해보자.
그리고 건물주와 협약하거나 필요한 경우 공공이 확보해 청년단체, 문화예술단체, 관광활동가, 사회적기업, 마을공동체, 청소년단체, 돌봄단체 등에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조건은 단순해야 한다.
“이 공간을 이용해 시민에게 무엇을 돌려줄 것인가?”
청년들은 작은 창업 실험을 할 수 있다.
예술가는 작업실과 전시공간을 만들 수 있다.
지역의 어르신들은 여행자에게 묵호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사가 될 수도 있다.
청소년들은 작은 미디어 스튜디오를 만들 수 있고, 여행자와 주민이 함께하는 문화 프로그램도 가능하다.
차와 음악, 그림, 사진, 책, 공예가 한 공간에서 만날 수도 있다.
하나의 공간이 살아나면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람이 찾아오면 옆 카페에 들어간다.
밥을 먹는다.
물건을 산다.
또 다른 가게가 들어온다.
그렇게 ‘공간→사람→관계→소비→상권’으로 이어지는 작은 선순환을 만들어볼 수 있다.
보조금보다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큰돈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가장 절실한 것은 ‘활동할 장소’다.
회의할 곳이 없고, 작은 프로그램을 진행할 공간이 없으며, 매달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 좋은 아이디어가 사라진다.
한쪽에는 사람이 없어 비어가는 건물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공간이 없어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행정의 새로운 역할이 될 수 있다.
시민단체를 ‘지원 대상’이 아니라 ‘도시의 파트너’로
고베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은 행정의 도움을 받는 대상만이 아니다.
도시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파트너다.
행정에는 예산과 제도가 있다.
기업에는 자본과 경영 능력이 있다.
시민단체에는 현장성과 관계망,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세 영역이 서로의 장점을 연결한다면 지방도시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특히 인구감소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공무원을 계속 늘릴 수도 없고 모든 문제를 예산만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결국 도시 안에 숨어 있는 시민의 능력을 얼마나 끌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묵호에서 작은 실험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나는 거창한 사업부터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묵호나 천곡의 빈 점포 몇 곳에서 작은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가칭 ‘동해 시민공간 프로젝트’다.
공실이 장기화된 공간을 발굴하고, 건물주·동해시·NPO·시민단체가 협약을 맺는다.
1~2년 동안 낮은 임대료 또는 일정 조건 아래 공간을 제공하고, 그곳에서 문화·관광·청소년·돌봄·교육·창업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과가 있으면 확대하고, 효과가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도시정책도 이제는 작은 실험이 필요하다.
빈 가게는 도시의 실패가 아니라 가능성일 수 있다
빈 점포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었으면 한다.
문 닫은 가게라고만 생각하면 쇠퇴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사람들이 만나게 만들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빈 공간은 새로운 도시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1995년 고베의 재난은 일본 사회에 시민의 힘을 다시 발견하게 했다.
그 경험은 1998년 NPO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동해시가 고베를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제도가 아니라 생각의 전환이다.
행정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민이 할 수 있도록 행정이 길을 열어주는 도시로.
동해에는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청년도 있고, 예술가도 있고, 관광활동가도 있고, 오랫동안 지역을 지켜온 주민과 수많은 시민단체도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거대한 예산이 아니라 작은 공간 하나와 기회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동해시에 묻고 싶다.
비어가는 도시의 공간을 계속 바라만 볼 것인가.
아니면 그 공간의 문을 시민에게 열어
다시 사람이 모이는 도시를 만들어볼 것인가.
《동해의 내일을 묻다Ⅱ》가 던지는 다섯 번째 질문이다.
BEST 뉴스
-
[지형덕칼럼] 동해 AI데이터센터, 규모보다 수요와 효율을 증명해야 한다
AI 연산 효율을 높이는 기술 등장…동해시와 GS는 단계별 수요·전력 사용·지역 혜택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Emerging technologies aim to improve AI computing efficiency. Donghae and GS should explain phased demand, power requirements and tangible local benefits. AI데이터센터의 경쟁력을 설명할 때... -
[지형덕칼럼] 동해시장, AI데이터센터의 ‘규모’보다 ‘실익’을 증명하라
GS의 냉각기술 개발과 도의회의 상생 요구가 던지는 질문…전력·물·고용·지역기업 참여를 검증 가능한 계획으로 제시해야 한다 GS’s cooling technology initiative and provincial calls for community benefits demand verifiable plans for power, water, employment and local business participation. 동... -
동해 AI데이터센터, 전기는 어디서 오나…화력발전 연계 계획 설명 필요
동해 AI데이터센터 캠퍼스의 전력공급과 관련해 화력발전소 연계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과 지역 환경에 미칠 영향을 설명할 필요가 제기된다. 대규모 전력 확보 여부와 함께 어떤 발전원에서 전기를 조달하고, 기존 발전소 운영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시민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 -
[기자의눈]동해 AI데이터센터, 시민의 알권리에서 상생을 시작하자
전력·물·생활환경과 지역 일자리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신뢰의 출발점…동해시와 GS가 사업 초기부터 공개하고 소통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Clear information on power, water, living conditions and local jobs is essential to trust. Donghae and GS should establish transparent communication from the outs... -
동해 AI데이터센터, 주민의 ‘열섬·농작물 피해’ 우려에 자료로 답해야
시사K뉴스|지형덕 기자 동해 AI데이터센터 주변 주민들이 걱정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열이다. 기존 산업시설이 들어선 지역에 대규모 데이터센터까지 가동되면 여름철 생활환경과 인근 농작물에 부담이 더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주민설명회에서는 인근 포도농원의 피해를 호소하며 데이터센터 조성 이후 ... -
[지형덕칼럼] 강릉 AIDC 논란의 교훈…동해시장, 상생에도 ‘패스트트랙’을 적용하라
지형덕|시사K뉴스 강릉 AI데이터센터 유치를 둘러싼 정치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시민이 확인해야 할 핵심은 정당 간 비난의 강도보다 사업의 실제 준비 수준이다. 무엇이 확정됐고 무엇이 협의 중인지, 전력과 부지 등 필수 조건은 어느 단계까지 확보됐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국민의힘 강원지역 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