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8.17 이재호 극동대 교수·전 동아일보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은 8월 3일 서울에 온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았다. 한미동맹의 회복을 공언해온 대통령이었기에 의외였다. “미 측에 휴가 중이어서 만나기 어렵다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고 정부는 설명했지만 석연치 않았다. 보수층의 실망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중국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무성했다.
엿새 뒤인 9일, 중국은 한중 외교장관회담에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3불 1한을 요구하며 우리 측을 강하게 압박했다.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도 결성하지 않는다는 3불에 더해 기 배치된 사드의 운용까지 제한(1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은 게 아닐까. 중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말이다. 여론도 ‘만나야 한다’는 쪽이 우세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조사에 따르면 찬성이 60.3%였다. 그런데도 만나지 않았다. 대신 펠로시 의장과 40여 분 간 통화했다.
중국이 ‘사드 압박’을 했던 그날 윤 대통령은 골드버그 주한미대사와 러캐머라 한미연합사령관을 용산으로 불렀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한미동맹에 관해 주로 논의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특히 22일부터 실시되는 후반기 연합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UF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부는 오래 전 계획된 간담회였다고 했지만 펠로시 의장의 방한을 전후해 한-중, 한-미가 긴박한 외교게임을 벌인 셈이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 속에 봐야한다. 펠로시 의장에 대한 의전(공항영접) 소홀과 관계자의 부적절한 언급으로 사안이 더 부각된 점이 있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다.
단언컨대 이런 일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미-중 신(新) 냉전체제 아래서 우리는 두 초강대국과 동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실로 어려운 환경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남북관계라도 개선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됐다. 오히려 북한의 핵보유 실현으로 상황만 꼬이고 말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윤 대통령은 12일 출근길에서 ‘미·중을 대하는 외교원칙이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민국 국익”이라고 답했다. 쉽고도 명쾌했다. 이 엄혹한 환경 속에서 ‘국익’ 말고 우리가 붙들고 놓치지 않아야 할 다른 어떤 원칙이 있겠는가. 다른 나라도 비슷하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분단된 채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 그만큼 더 절박하다.
대통령은 “한미 간 글로벌·포괄적 전략동맹이 우리 외교의 근간”이라면서, 다만 “불필요하게 어떤 나라와의 마찰이나 오해가 없도록 상호존중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어떤 나라’는 물론 중국이다. 대통령은 미-중 사이에서 우리가 국익을 실현할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원칙과 실용의 조화’로 이해했다. 국익은 원칙과 실용이 지혜롭게, 때로는 용기 있게 맞물릴 때 얻어진다. 그게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정치적 현실주의(political realism) 외교의 요체다. 전후(戰後), 크고 작은 외교정책의 성공신화들은 현실주의 외교의 기초, 곧 원칙과 실용의 조화 속에서 가능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을 압박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성공한 이승만, 미소(美蘇) 대결의 냉전시대에 7·4 공동성명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박정희, 북방정책의 노태우 대통령 등이 그러했다. 포용정책(햇볕정책)을 편 김대중 대통령마저도 ‘대화’를 말하려면 반드시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먼저 강조하곤 했다.
취임 100일, 윤 대통령은 자신도 원칙과 실용의 조화를 통해 국익을 지켜온 전임자들과 같은 뿌리 위에 섰음을 분명히 했다. 그가 8·15 경축사에서 밝힌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와 담대한 대북 지원’ 제안도 그 같은 맥락이다. ‘어떻게’(how)라는 물음표가 항상 따라다니겠지만 뒷날 ‘윤석열 독트린’으로 기록될 수 있도록 체제와 내용을 다듬고 실천함으로써 한국 외교사에 한 족적을 남겼으면 한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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